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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보다 악역에게 더 감탄한 적 있으신가요? 저는 《구경이》를 보는 내내 그랬습니다. JTBC에서 방영된 이 작품은 이영애 씨가 출연했음에도 크게 화제가 되지 못했는데, 솔직히 왜 묻혔는지 이해가 안 될 만큼 잘 만들어진 드라마였습니다. 연쇄살인마 송이경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추리보다 사람의 심리가 더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소시오패스 캐릭터, 이렇게까지 정교할 수 있을까
드라마 속 송이경은 처음부터 범상치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를 위해 고양이를 학살한 수위에게 막걸리에 부동액을 타서 독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놀라운 건 그 과정에서 감정 표현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경은 기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처리할 일을 처리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여기서 소시오패스(sociopath)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소시오패스란 반사회적 인격장애의 한 형태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여되어 있고 자신만의 논리 체계에 따라 행동하는 성향을 의미합니다. 사이코패스와 자주 혼동되는데, 사이코패스(psychopath)가 선천적 뇌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면, 소시오패스는 환경적 요인이 크다고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 NIMH).
드라마는 이경을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인물로 그립니다. 감정이 없으면서도 사람의 심리를 정밀하게 계산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잔인한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을 관찰하고 분석하는 기계처럼 작동합니다. 저는 이 장면들을 보면서 "도대체 저런 생각을 어떻게 했지?"라는 감탄이 먼저 나왔습니다. 물론 실제로 저런 사람을 만나면 끔찍하겠지만, 이야기 안에서는 그 냉정함이 섬뜩하게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 소시오패스: 공감 능력 결여, 반사회적 행동, 자기만의 논리 체계로 움직임
- 사이코패스: 선천적 뇌 구조 차이에서 비롯, 충동 조절 문제가 더 두드러짐
- 이경은 두 특성이 결합된 형태로 묘사되며, "죄지은 사람만 죽인다"는 자체 규범을 철저히 따름
연쇄살인의 설계 방식, 추리보다 더 무서운 것
《구경이》의 살인 방식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경은 사건마다 치밀한 연출 구조를 갖춥니다. 보험 사기를 꾸민 부부 사건에서는 남편이 자살한 것처럼 위장된 상황 전체를 직접 설계했고, 대학 축제 현장에서는 세 가지 약품을 따로 접촉시키는 방식으로 타깃에게만 독성이 발현되도록 했습니다. 각각은 무해하지만 섞이면 치명적인 성질을 이용한 것이죠.
이 장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화학 지식이 이렇게 쓰일 수 있다는 데 놀랐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이를 VX나 노비촉 같은 신경작용제(nerve agent) 계열 원리에서 착안한 것으로 묘사합니다. 신경작용제란 신경계를 교란해 단시간 내에 사망에 이르게 하는 화학물질로, 실제로 2017년 김정남 암살 사건에서 VX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드라마는 이 사례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이경의 살인 방식이 허구가 아닌 실제 원리에 기반함을 암시합니다.
더 소름 돋는 부분은 조력자 네트워크의 존재입니다. 이경의 주변에는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태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들이 있습니다. 보안 업체 직원 건욱이 타깃의 폰을 해킹하고, 다른 조력자들이 현장을 준비합니다. 이는 범죄학에서 말하는 셀 구조(cell structure), 즉 구성원이 서로를 알지 못하도록 분리된 조직 형태와 유사합니다. 이 구조 덕분에 이경은 추적망에 걸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 설정을 보면서 드라마가 단순한 살인극이 아니라 조직 설계까지 생각하고 만든 작품이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인간관찰 능력, 작가가 진짜 무서운 이유
저는 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배우보다 작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대사는 어떻게 썼을까", "이 반전은 어디서 떠올렸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구경이》를 보는 내내 그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습니다.
이경이 윤재영을 공범으로 만드는 과정을 보면, 단순히 협박이나 위협이 아닙니다. 상대가 가장 약해진 순간을 포착하고, 죄책감을 건드리고,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이건 심리학에서 말하는 가스라이팅(gaslighting)과 다릅니다. 가스라이팅이 상대의 현실 인식을 왜곡하는 방식이라면, 이경이 쓰는 기술은 상대의 욕망과 두려움을 정확히 짚어 행동을 유도하는 소셜 엔지니어링(social engineering)에 가깝습니다. 소셜 엔지니어링이란 기술적 해킹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원하는 행동을 하도록 조종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출처: 미국 사이버보안·인프라보안국 CISA).
저는 솔직히 이런 능력이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나쁜 목적으로 쓰인다면 끔찍한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정밀하게 읽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능력입니다. 저는 대화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아까 그 말은 무슨 뜻이었을까"를 혼자 몇 번씩 되짚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하는 순간 상대의 기분을 읽는데, 저는 한참 지나서야 "아, 그때 기분이 상했구나" 하고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더 인상 깊었습니다. 이경이라는 캐릭터를 만든 작가는 인간의 욕망과 불안, 허영심과 외로움을 얼마나 오래 관찰했으면 이런 장면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라마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술은 배울 수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은 정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이경 vs 경희, 두 천재의 추격전이 만드는 긴장감
《구경이》가 단순한 범죄 드라마를 넘어서는 이유는 추격하는 쪽도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보험 조사관 허경희는 폐인 상태에서 시작하지만, 한번 사건에 발동이 걸리면 아무도 따라잡기 어려운 추리력을 발휘합니다. 절벽 혈흔과 바다에서 발견된 신발만으로 자살을 위장한 보험 사기를 꿰뚫고, 감기 눈길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습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경희가 이경을 처음 심문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경은 완벽한 여고생 모습으로 눈물까지 짜냈는데, 경희는 "인정하긴 싫은데 비슷한 데가 있네"라는 말을 남깁니다. 두 사람이 닮았다는 설정인데, 실제로 보면 그 말이 맞습니다. 둘 다 사람을 꿰뚫어 보고, 상황을 장악하려 하고, 자기만의 논리가 강합니다. 다만 방향이 정반대일 뿐이죠.
이 구도는 프로파일링(profiling)의 원리와도 닿아 있습니다. 프로파일링이란 범죄 현장의 단서를 통해 범인의 심리·행동 패턴을 분석하는 기법을 의미합니다. 경희는 공식 경찰이 아니기 때문에 제도적 제약 없이 이 방법을 훨씬 자유롭게 구사합니다. 그 자유로움이 이경을 가장 가까이 따라붙을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추격전의 묘미는 누가 한 수 앞서 있는지 계속 바뀐다는 점입니다. 이경이 전담반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고 유유히 사라지는가 하면, 경희는 아주 작은 단서 하나로 이경의 다음 행동을 예측합니다. 보는 내내 어느 쪽 손을 들어줘야 할지 모르는 묘한 감정이 드는데, 저는 그 점이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잘 만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결론
《구경이》를 다 보고 나서 오래 남은 건 추리 기법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얼마나 어렵고 대단한 재능인지, 그 감각이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저는 드라마를 보면서 이경이라는 캐릭터보다도 그 캐릭터를 설계한 작가에게 더 감탄했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불안, 허영심과 외로움을 이렇게 촘촘하게 엮어낸다는 건 단순히 머리가 좋은 것과는 다른 능력입니다.
추리 드라마를 좋아하신다면 당연히 추천드리고, 그렇지 않더라도 "왜 사람들은 저런 선택을 할까"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분명히 재미있게 보실 수 있습니다. 범인을 잡는 과정보다 사람을 관찰하는 드라마가 더 취향에 맞는 분께 자신 있게 권해드립니다. 분량 관계상 생략한 부분이 많으니, 풀 내용은 아래 참고 링크를 통해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