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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고 있는 두 사람 (알수록 식는 마음, 모른다는 것, 안전하게 알아가기)

tigermorning 2026. 9. 4. 08:33

목차


    일본 드라마 '굽고 있는 두 사람' 포스터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사람을 알아갈수록 오히려 마음이 식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잘 모르는 사람 쪽으로 끌렸는데, 그 선택이 제게 꽤 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했습니다. 일본 드라마 《굽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 이유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알수록 식는 마음, 이게 문제였을까

    저는 이 패턴이 오래됐습니다. 처음 만날 때는 분명히 좋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의 빈틈이 보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마음이 확 돌아서 있더라고요. 이걸 심리학에서는 탈이상화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탈이상화란, 처음에 이상적으로 그렸던 상대의 이미지가 실제 모습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일어나는 현상인데, 저는 유독 그 반응이 빠르고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제가 선택한 방식은 "모르는 채로 뛰어드는 것"이었습니다. 모르면 이상화가 유지되고, 그러면 마음이 식지 않는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반은 맞고 반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좋은 감정이 유지된 것도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모르기 때문에 위험한 사람도 그냥 통과시켜 버렸습니다. 몇 번은 꽤 오래 후회했습니다.

     

    관계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상대를 충분히 알기 전에 감정적으로 깊이 투자하는 패턴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어 부적절한 상대를 선택할 위험성을 높인다고 합니다(출처: Psychology Today). 저는 그걸 몸으로 먼저 배웠습니다.

     

    "모른다"는 것의 종류

    《굽고 있는 두 사람》의 남녀 주인공 켄타와 치히로는 서로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로 결혼부터 해버립니다. 설정만 들으면 황당한데, 막상 보면 두 사람의 "모름"이 제가 겪었던 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제가 경험한 모름은 확인을 피하는 모름이었습니다. 알고 싶지 않아서 안 알아가는, 일종의 회피적 애착 패턴이었습니다. 여기서 회피적 애착이란, 상대와 가까워지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친밀감 형성 자체를 무의식적으로 피하는 심리적 경향을 뜻합니다. 반면 켄타와 치히로의 모름은 아직 알기 전이라는 의미의 모름입니다. 매주 같은 자리에서 바비큐를 구우면서, 천천히, 한 번에 하나씩 알아가는 방식입니다.

     

    이 차이가 드라마를 보는 내내 묘하게 걸렸습니다. 두 사람이 경계를 허무는 데 사용하는 도구가 고기라는 점도 그렇습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는 심리학적으로 공유 경험을 통한 신뢰 형성에 효과적인 방식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창한 고백이나 감정의 과잉 없이, 그냥 같이 굽고 같이 먹는다는 반복이 두 사람 사이에 신뢰를 만들어갑니다.

     

    제가 해온 방식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됩니다.

    • 제 방식: 모르는 채로 감정 먼저 투자 → 위험 노출 증가 → 상처 후 회피 반복
    • 드라마 속 방식: 모르는 채로 시작하되 반복적 공유 경험으로 신뢰를 쌓아가며 친밀감 형성

    같은 "모름"처럼 보여도 그 구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안전하게 알아가는 관계, 실제로 가능한가

    이 드라마가 밍밍하다는 혹평을 받는 이유도 어느 정도 이해는 됩니다. 갈등도, 배신도, 삼각관계도 없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게 다야?" 싶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저는 막장 전개에 너무 익숙해진 탓에 드라마 속 인물이 그냥 착하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졌던 겁니다.

     

    치히로의 상사도, 켄타의 친구도, 회사 동료들도 다들 그냥 좋은 사람입니다. 제 경험상 실제 인간관계에서도 나쁜 사람만 있지는 않은데, 어느 순간부터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을 보면 "저 사람 뭔가 숨기는 거 있겠지"라는 식으로 먼저 의심하게 됐더라고요. 이건 과잉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잉경계란 과거의 부정적 경험이 반복되면서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 신호에도 위협을 느끼게 되는 심리 상태입니다.

     

    애착 이론 연구에서는 안정적 애착 형성에 있어 반복적이고 예측 가능한 공유 경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출처: Verywell Mind). 켄타가 매주 같은 방식으로 요리를 준비하고 치히로를 기다리는 그 반복이 바로 그 역할을 합니다. 저한테는 그런 반복이 없었습니다. 항상 한 번에, 전부 걸고, 빠르게 뛰어들었습니다.

     

    이 드라마가 저한테 준 건 따뜻한 위안보다는 하나의 방향이었습니다. 몰라도 된다는 게 아니라, 몰라도 안전하게 알아갈 수 있다는 것. 그 과정이 꼭 드라마틱할 필요도 없고, 고기를 굽는 것처럼 평범해도 된다는 것.

     

    지금 관계에서 자꾸 모르는 사람 쪽으로 끌린다면, 혹은 알아갈수록 마음이 식는다면, 이 드라마를 한 번 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뭔가를 해결해 주진 않지만, 적어도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는 건 보여줍니다. 저는 그걸 꽤 늦게 알았습니다. 《굽고 있는 두 사람》은 왓챠, 웨이브, 티빙에서 시청 가능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bcetaoV1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