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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8편 승객들에게 몇 시간이었던 시간이, 세상에는 5년이었습니다. 저는 이 설정을 처음 접했을 때 '드라마적 과장'이라고 넘기려 했는데, 이상하게 그게 되지 않았습니다. 매일 하루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는 감각을 오래 갖고 살아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매니페스트》 시즌1은 미스터리 드라마지만, 저에게는 시간이 사람마다 얼마나 다르게 흐르는지를 보여준 작품으로 남았습니다.
시간 상실
혹시 이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분명 앉아서 잠깐 쉬었을 뿐인데, 고개를 들어보니 창밖이 어두워져 있는. 저는 그게 꽤 오래된 일상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24시간인 하루가 저에게는 10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는 기분, 표현하기 어렵지만 늘 그랬습니다.
《매니페스트》는 바로 그 감각을 드라마적으로 극단화한 작품입니다. 몬테고항공 828편 승객들은 비행 중 원인 불명의 난기류를 겪고 착륙하지만, 그들에게는 몇 시간이었던 시간이 지상에서는 5년 6개월이 흘러 있었습니다. 남자친구였던 제러드는 이미 새 가족을 꾸렸고, 단짝 친구가 그 상대였습니다. 승객들은 멀쩡히 살아 돌아왔지만, 삶의 맥락 전체가 낯선 것으로 교체되어 있었습니다.
시간 상실(Time Loss)이란 개념은 심리학에서도 다뤄집니다. 여기서 시간 상실이란 자신이 경험한 시간이 실제 흐른 시간과 다르게 느껴지는 현상을 말하는데, 해리 증상이나 우울 삽화(Depressive Episode) — 쉽게 말해 우울증의 한 단계적 상태 — 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저도 우울증 관련 글을 읽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하루가 사라지는 경험"이라는 표현을 발견하고 잠시 멈췄던 적이 있습니다. 그제야 제가 느끼던 감각이 저만의 이상한 습관은 아닐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방향은 정반대입니다. 828편 승객들은 멈췄다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 시간을 맞닥뜨렸고, 저는 처음부터 너무 빠르게 흘러가 버리는 시간을 붙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둘 다 결국 시간을 자기 뜻대로 쥐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 828편 승객 기준 비행 시간: 수 시간 / 지상 경과 시간: 5년 6개월
- 미케일라의 전 남자친구 제러드는 이미 재혼 상태였고, 상대는 미케일라의 단짝 친구
- 시간 상실 감각은 우울 삽화(Depressive Episode) 증상 중 하나로도 보고됨 (출처: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NIMH))
계시(Calling)
드라마에서 가장 독특한 설정은 '계시(Calling)'입니다. 계시란 828편 탑승자 일부가 특정 상황에서 받게 되는 강렬한 환청이나 환상으로, 이것이 지시하는 대로 행동하면 누군가를 구하거나 진실에 가까워지는 구조입니다. 쉽게 말해, 주인공들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충동을 따라가다 사건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뉴욕 경찰이었던 미케일라가 처음 목소리를 들었을 때, 그 목소리는 창고에 갇혀 있던 개들을 풀어주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유도 모른 채 따랐더니, 그 개들이 지키고 있던 창고 안에서 납치된 사람이 발견됐습니다. 합리성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행동이 결과적으로 옳았다는 서사입니다. 오빠 벤 또한 마찬가지였는데, 둘은 각자 따로 같은 계시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며 오히려 '논리 이전의 감각'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해야 할 것 같은데 설명할 수 없는 것, 나중에 돌아보면 그게 맞았던 경우. 물론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는 않지만, 제 경험상 이건 그렇게 낯선 감각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감각을 신뢰할 수 있는지 여부였고, 미케일라와 벤도 내내 그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계시를 무시하거나 공개적으로 발설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드라마는 보여줍니다. 동승객이었던 켈리는 자신들의 경험이 정부 음모라며 언론에 폭로하다 살해당했고, 그리핀이라는 전직 범죄자는 계시를 개인적 이익에 활용하다 기괴한 방식으로 사망합니다. 계시를 'SAP(Special Access Program)' — 즉 정부 기밀 프로그램 — 과 연결하려는 국가안보국(NSA)의 시도도 등장하는데, 여기서 SAP란 극히 제한된 인원만 접근 가능한 미국 정부의 특수 기밀 프로그램을 뜻합니다.
사망 예정일(Death Date)
시즌1의 마지막에서 드라마는 가장 묵직한 질문을 꺼냅니다. 828편 승객들이 사라졌던 기간과, 다시 돌아온 후 사망한 사람들의 생존 기간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벤과 산비가 데이터를 맞춰보는 장면은 꽤 서늘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습니다. 828편 탑승자들에게는 사망 예정일 혹은 데스 데이트(Death Date), 즉 정해진 죽음의 시한이 있을 수 있다는 것.
데스 데이트란 드라마 《매니페스트》에서 승객들이 지상에서 사라져 있던 기간만큼의 수명만 남아 있다는 가설로, 시즌1 후반부의 핵심 갈등 축이 됩니다. 쉽게 말해, 비행기가 5년 6개월 사라져 있었다면, 돌아온 후 5년 6개월이 지나면 승객들이 죽는다는 설정입니다.
이 설정이 저를 오래 붙잡았던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남은 시간을 안다는 것이 삶을 더 충실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반대로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드는가. 이건 드라마 속 인물들만의 질문이 아닙니다. 저도 오래전부터 하루를 잃어버리는 기분으로 살다 보니, 언젠가부터 '내가 지금 이 시간을 제대로 쓰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꽤 무겁게 느껴집니다.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알면서도, 몸은 여전히 흘려보내고 있다는 자기모순 말이죠.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하루를 길게 기억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날 경험을 충분히 의식하며 살아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마음 챙김(Mindfulness) — 현재 순간을 의도적으로 인식하는 훈련 — 이 시간 지각(Time Perception)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출처: 미국심리학회(APA)). 여기서 시간 지각이란 동일한 시간을 사람마다 다르게 길거나 짧게 체감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뜻합니다.
- 데스 데이트(Death Date): 828편 사라진 기간 = 생존자에게 남은 수명이라는 가설
- 시즌1 기준, 이 사실을 가장 먼저 계산해낸 인물은 의사이자 탑승객이었던 산비
- 마음챙김(Mindfulness) 훈련은 시간 지각(Time Perception)을 실제로 변화시킨다는 연구 결과 있음
《매니페스트》를 다 보고 나서 며칠 동안 자꾸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비행기 안의 사람들은 그대로였는데, 비행기 밖의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는 것. 저는 그 설정이 결국 이 질문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지금 시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시간 밖에 있습니까.
제가 되찾고 싶은 것은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시간을 살아냈다는 감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젠가는 "오늘도 하루가 사라졌다"가 아니라 "오늘은 이런 하루였다"라고 말하며 잠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비슷한 감각을 갖고 계신 분이라면, 이 드라마가 생각보다 가깝게 느껴지실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