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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시즌 다섯 개짜리 드라마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세계 최고의 드라마'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는데, 막상 시작하기가 너무 무거웠거든요. 그리고 그 당시, 제가 또 다른 유명한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봤었는데 시리즈가 너무 많아서그냥 의무감에 드라마를 봤기 때문에, 또 다른 장편 드라마를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1화를 틀었다가 새벽 네 시가 됐습니다. '브레이킹 배드'는 그런 드라마입니다. 범죄 스릴러로 시작해서, 어느 순간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되어 있는.
피카레스크 구조
드라마를 보다가 스스로 깜짝 놀란 순간이 있었습니다. 마약을 만들고,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월터 화이트를 제가 응원하고 있었거든요. 처음에는 '내가 왜 이러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이건 작품이 의도한 구조였습니다.
브레이킹 배드는 전형적인 피카레스크(Picaresque) 서사 구조를 따릅니다. 피카레스크란 15~16세기 스페인에서 유행한 문학 장르로, 선과 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물이 점점 도덕적으로 타락해 가는 과정 자체를 서사의 중심에 두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착한 주인공이 악당을 이기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악당이 되어가는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선악 구도가 없으니 관객은 자연스럽게 악인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됩니다.
제가 최근에 봤던 이런 구조를 가진 영화는 '대외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거 뒤편의 부패한 세계를 다루는 이야기인데, 거기서도 저는 부패한 인물의 선택에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습니다. 장르도 소재도 다르지만, 관객이 악행에 동조하게 만드는 피카레스크 구조는 동일했던 겁니다.
- 피카레스크 구조: 주인공의 도덕적 타락 과정을 중심에 두는 서사 방식
- 선악 대결 없이 인물의 내면 변화로 긴장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
- 관객이 도덕적으로 판단하기 전에 감정적으로 이입하게 만드는 설계
- 빈스 길리건 감독은 엑스파일 각본가 출신으로, 브레이킹 배드 전 시즌을 기획·공동 집필·연출했습니다
이 드라마가 단순한 범죄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인을 판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이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이해는 어느 순간 우리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당신이라면 어디까지 버텼겠느냐고.
월터와 제시, 이성과 감성의 두 얼굴
솔직히 처음에는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톤 분)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노벨화학상 수준의 연구에 기여한 천재 화학자가 폐암 말기 선고를 받고, 가족을 위해 메스암페타민 제조에 뛰어든다는 설정이 극적으로 강렬하니까요.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저를 더 붙잡은 건 제시 핑크맨(아론 폴 분)이었습니다.
월터와 제시는 성씨에서부터 대비가 선명합니다. 화이트(White)와 핑크맨(Pinkman), 이성의 차가운 흰색과 감성의 따뜻한 분홍색입니다. 월터는 자기합리화(Self-rationalization)의 달인입니다. 자기합리화란 자신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어도 이성적 논리를 내세워 정당화하는 심리 기제를 말합니다. 월터는 "가족을 위해서"라는 대전제로 모든 악행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킵니다. 드라마 후반부에 가서야 그 핑계가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만, 그 순간이 오기까지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면 제시는 늘 흔들립니다. 나쁜 짓을 하고 죄책감에 무너지고, 다시 나쁜 짓을 하고 또 괴로워합니다. 저는 이 반복이 처음에는 답답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흔들림이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반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어떤 선택을 하고 나서 오래 후회하거나,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은데 쉽게 바뀌지 않는 제 모습을 볼 때가 있거든요. 그래서 나중에는 제시가 범죄자가 아니라 그냥 한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캐릭터 분석 측면에서 보면, 두 인물의 대비는 단순한 이분법이 아닙니다. 캐릭터 분석이란 인물의 내면 동기와 행동 패턴을 심층적으로 읽어내는 방식으로, 브레이킹 배드는 이 분야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월터에게도 감정이 있고, 제시에게도 판단력이 있습니다. 다만 비중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이 우월한 것도 아니고, 감성적이라고 해서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국 리메이크 가능성?
브레이킹 배드를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마약은 저와 전혀 상관없는 세계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미국 드라마니까, 미국 남서부 뉴멕시코 사막 이야기니까. 그런데 요즘은 다릅니다. 유명인 자제부터 평범한 직장인까지, 마약 관련 뉴스가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이 드라마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옵니다.
대검찰청 마약류 범죄백서에 따르면 국내 마약류 사범은 2022년 기준 18,395명으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습니다(출처: 대검찰청). 우리는 이제 농담으로도 '마약청정국'이라는 말을 쓰기 어렵게 됐습니다. 브레이킹 배드가 그려내는 마약 제조와 유통의 세계가 더 이상 바다 건너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 리메이크 소식은 꽤 흥미롭게 들렸습니다. 영화 '그대 어이가리'로 해외 영화제에서 50관왕을 기록한 이창열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고 했을 때는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소식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후속 발표가 없는 것을 보면, 제작이 쉽지 않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원작의 세계관을 한국 사회로 이식하는 일이 만만치 않을 테니까요.
그래도 저는 이 시도가 지금보다 더 적합한 시점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이었다면 "한국에서 마약 제조라니 너무 허무맹랑하다"는 반응이 많았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현실성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씁쓸한 이유로 맞는 시기가 된 셈입니다. 한편 넷플릭스에 공개된 후속 영화 '브레이킹 배드: 엘 카미노'는 본편이 끝난 후 제시의 행방을 다루는데, 빈스 길리건 감독은 여기서 분명한 메시지를 남깁니다. 이성보다 마음을 따른 제시에게 내일이 있다고. 이 결말은 원작 팬으로서 정말 오래 남는 장면이었습니다(출처: Netflix - El Camino).
베터 콜 사울까지 다 보고 난 뒤에는 이 세계관이 얼마나 촘촘하게 설계되어 있는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인물 하나하나가 단순한 선악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그게 이 시리즈를 시간이 지나도 다시 꺼내 보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요즘 북중미 월드컵 중계를 보다 보면 뉴멕시코와 미국 남서부 풍경이 자꾸 눈에 들어옵니다. 언젠가 앨버커키의 사막 도로를 직접 달리며 드라마 속 장면들을 하나씩 떠올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브레이킹 배드를 명작으로 만드는 것은 마약도 총격전도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이 욕망과 두려움 속에서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를, 지나치게 극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월터의 이야기에서는 자존심과 자기합리화가 인간을 얼마나 멀리까지 데려갈 수 있는지를 봤고, 제시의 이야기에서는 끝까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가장 인간적일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길다는 이유로 미루지 마세요. 저처럼 1화 틀었다가 새벽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고: 홍종선 캐릭터탐구 - 브레이킹 배드 (1), 데일리안 / 홍종선 캐릭터탐구 - 브레이킹 배드 (2),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