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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심이 될 수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진심 없이 시작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백화살》을 보면서 그 믿음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환생한 여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판을 짜는 이 드라마가 제 오래된 후회 하나를 꺼내놓더군요.
자가복제 논란, 실제로 보니 어떤가
《백화살》 첫 회를 보고 저도 솔직히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극 초반의 서사 구조와 카메라 워킹이 맹자의의 전작 《구중자》와 지나치게 닮아 있다는 지적, 화면을 보는 내내 그게 계속 걸렸습니다.
여기서 자가복제란 배우나 제작진이 흥행했던 이전 작품의 연출 공식, 캐릭터 설정, 심지어 성우 배역까지 그대로 답습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실제로 맹자는 2024년 《구중자》 이후 《도화영강산》, 《회수죽정》, 《백화살》까지 쉬지 않고 강인한 여주인공 캐릭터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차기 대기작인 《상공주》와 《장문쿠》 역시 복수와 강인함이라는 설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흥행한 공식을 반복하는 건 제작사 입장에서 가장 안전한 전략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그 안전함이 오히려 독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한 번 잘됐던 방식을 계속 우려먹다가 결과가 더 나빠졌던 경험이 있거든요. 익숙함이 편안함이 아니라 피로감으로 읽히기 시작하는 순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럼에도 연기력 자체는 탄탄하다는 평가는 맞습니다. 문제는 배우가 아니라 기획의 방향입니다. 배우의 역량은 충분한데 그 역량을 같은 틀에만 계속 끼워 넣는 구조, 그게 더 아깝게 느껴졌습니다.
환생복수극이 건드리는 것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그때 그 선택을 안 했다면 어땠을까.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분명히 달랐을 텐데. 《백화살》의 여주인공 고청치가 다른 육신으로 환생해 다시 판을 짜는 설정을 보자마자 그 상상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여기서 환생복수극이란 전생에서 억울하게 죽은 인물이 다른 몸으로 다시 태어나거나 빙의해 이전 생의 원한을 갚고 주도권을 되찾는 장르적 공식을 뜻합니다. 이 공식이 계속 소비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현실에서 돌이킬 수 없었던 일을 드라마 속에서라도 되돌리는 대리만족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예전에 어떤 선택 하나를 오래 후회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아는, 억울한 종류의 후회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환생은커녕 그 사람한테 문자 한 통 다시 보낼 용기도 없었습니다. 고청치는 새로운 몸으로 깨어나 상황을 냉철하게 파악하고 움직이는데, 저는 이불 속에서 생각만 하다 끝났습니다. 그 격차가 솔직히 좀 웃겼고, 동시에 자극이 됐습니다.
이 장르가 계속 통하는 이유를 콘텐츠 분석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생의 상처가 전제되어 있어 복수의 당위성이 자연스럽게 확보됩니다
- 현재 서사에 전생의 기억과 감정이 겹쳐져 감정선이 풍부해집니다
- 독자·시청자가 현실에서 못 한 선택을 대신 해주는 구조적 카타르시스가 작동합니다
계산적 관계가 진심이 되는 경우
《백화살》에서 태자 소화과 소년군주 심석화가 처음 만나는 방식은 계산입니다. 서로의 패를 읽으려 하고, 필요에 의해 접근하며, 신뢰보다 셈법이 먼저입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시작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저는 이 부분에서 제 경험과 정반대의 결과를 떠올렸습니다.
저도 계산적으로 시작한 관계가 하나 있습니다. 그때는 그냥 서로 필요해서 만난 거였고, 감정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근데 지나고 보니 그 관계가 제일 오래가는 관계가 됐습니다. 제가 직접 겪고 나서야 알았는데, 계산으로 시작해도 시간이 쌓이면 진심이 되는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여기서 드라마가 다루는 것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닙니다.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관계가 감정적으로 진화하는 과정, 그 심리적 전환이 서사의 핵심입니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인지적 일관성 이론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인지적 일관성 이론이란 사람이 자신의 행동과 감정 사이의 불일치를 줄이려는 경향이 있어, 계속 함께 행동하다 보면 감정도 그에 맞게 변화한다는 이론입니다. 드라마 속 두 인물이 서로를 이용하면서도 점차 감정이 개입되는 구조가 바로 이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
하여가 연기하는 소화옹 캐릭터가 호평을 받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겉으로는 병약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냉철한 책사, 그 이중성이 계산과 감정 사이 어딘가에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 경험상 이런 인물 유형이 오히려 관계에서 더 진심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부터 감정을 내세우는 사람보다, 계산하다가 무너지는 사람의 서사가 더 오래 남습니다.
《백화살》은 도파민형 복수극으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냅니다. 다만 중후반부가 초반의 자가복제 논란을 덮을 만큼의 힘을 가질 수 있을지가 관건입니다. 저는 계산으로 시작해 진심이 된 두 인물의 감정선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고 싶어서라도 계속 보게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생엔 좀 더 계산적인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 이 드라마 보다가 또 한 번 했습니다.
참고: 출처: 백화살 공식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