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유괴의 날 (낯선 신뢰, 절박한 선택, 위기 유대감)

tigermorning 2026. 9. 2. 08:49

목차


    드라마 '유괴의 날' 포스터

    유괴범과 피해 아이가 한 팀처럼 움직인다는 설정,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유괴의 날》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도 살면서 딱 한 번,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낯선 사람에게 모든 걸 맡겨버린 적이 있었거든요. 그 기억이 드라마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낯선 신뢰가 시작되는 방식

    위기 상황에서 신뢰가 생기는 메커니즘을 심리학에서는 상황적 귀인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상황적 귀인이란, 어떤 사람의 행동을 그 사람의 성격보다 처한 상황으로 먼저 해석하는 심리 작용을 말합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이 귀인 방식이 강하게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논리보다 빠르게 신뢰가 형성됩니다.

     

    제가 경험한 그 순간도 딱 그랬습니다. 이유를 따질 여유가 없었고, 근거를 확인할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냥 지금 이 사람 말을 들어야 한다는 감각 하나만 있었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얼마나 위험한 선택이었는지 실감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습니다.

     

    《유괴의 날》에서 최로이가 김명준을 받아들이는 과정도 비슷한 구조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말이 안 됩니다. 자신을 유괴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그 신뢰가 어느 순간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함께 위기를 넘기는 과정에서 조금씩 쌓였다는 걸 보여줍니다. 그 점이 이 설정을 억지스럽지 않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봅니다.

     

    낯선 사람을 신뢰하게 만드는 요소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반복된 위기 상황에서의 동행 경험
    • 상대방이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는 신호의 누적
    • 다른 선택지가 없는 극한 상황

     

    절박한 선택과 그 경계

    《유괴의 날》에서 김명준이 유괴를 선택한 이유는 딸 희의 백혈병 치료비입니다. 백혈병 치료에는 조혈모세포이식이 필요하고, 그 비용은 현실적으로 감당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여기서 조혈모세포이식이란, 건강한 공여자의 혈액 줄기세포를 환자에게 이식해 정상적인 조혈 기능을 회복시키는 치료법을 뜻합니다. 치료 자체도 어렵지만, 그 비용 앞에서 사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이 드라마의 실질적인 질문입니다.

     

    저도 가끔 이런 상상을 합니다. 궁지에 몰리면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선택을 할 것 같다는 상상. 다행히 아직까진 그 정도로 몰린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김명준을 보면서 완전히 나쁜 사람으로도, 완전히 불쌍한 사람으로도 볼 수 없었던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사람의 선택과 책임 사이에서 경계가 계속 흔들렸습니다.

     

    이 지점에서 드라마가 설정하는 도덕적 딜레마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나쁜 수단으로 좋은 목적을 향하는 인물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드라마는 명쾌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 모호함 안에서 관객이 각자 자기 기준을 꺼내들게 만드는 구조입니다. 저는 그 점이 이 드라마를 단순한 스릴러 이상으로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위기 유대감이라는 장치의 설득력

    코믹 버디 스릴러라는 장르 규칙은 웃음과 긴장을 교차시키면서 관객이 감정적으로 과부하되지 않도록 조율합니다. 여기서 버디 스릴러란, 성격이나 처지가 다른 두 인물이 목표를 공유하며 함께 움직이는 구조의 스릴러를 말합니다. 《유괴의 날》이 이 장르를 선택한 이유는, 유괴범과 피해 아동이라는 극단적인 관계를 억지 감동 없이 설득력 있게 그리기 위한 선택으로 보입니다.

     

    제가 주목한 건, 그 웃음 뒤에 절박함이 계속 깔려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마냥 가볍게 볼 수 없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코미디의 리듬이 강해질수록 오히려 그 밑의 무게감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위기 유대감이 설득력을 갖는 데는 몇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1. 두 인물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피해자라는 사실이 초반부터 제시됩니다.
    2. 함께 위기를 넘기는 장면이 반복되면서 신뢰의 근거가 쌓입니다.
    3.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관계 구조가 유지됩니다.

     

    저라면 그 상황에서 최로이처럼 낯선 사람을 믿을 수 있었을까. 솔직히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한가운데에서 신뢰가 생기는 방식이 원래 그렇게 근거 없이 시작된다는 걸, 제 경험에서도 드라마에서도 똑같이 확인했습니다.

     

    낯선 신뢰가 어떻게 시작되는지 궁금하다면, 이 드라마는 꽤 정직한 답을 보여줍니다. 논리가 아니라 상황이 먼저 움직이고, 감정이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 순서가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아마 평소에 신뢰를 꽤 신중하게 쌓아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도 그런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이후로는 확신이 좀 흔들렸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TXS0Dgn-lB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