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한 편이 끝나고 나면 보통 우리는 배우의 이름이나 이야기의 여운을 오래 기억합니다. 하지만 감독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쉽게 흐려지곤 합니다. 특히 한국에서는 영화감독은 국제 영화제나 언론을 통해 비교적 자주 조명되는 반면, 드라마 감독은 작품의 흥행에 비해 이름이 덜 알려진 경향이 있습니다. 제가 즐겨보는 온라인 매거진 '롱블랙'을 통해 이재규 드라마 감독님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니, 한 사람의 집요함이 어떻게 수십 편의 대중적 히트작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새삼 놀라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영화로 치면 봉준호 감독 급의 영향력을 드라마라는 장르 안에서 구축해 온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제라도 그 이름을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집요함'이 성공의 열쇠
이재규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재능이라기보다 드라마를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영화를 만들고 싶었지만 TV 드라마 현장으로 방향을 틀어, 하루 20시간 가까이 서서 일하며 몸으로 현장을 익혀간 과정은 일반적인 의미의 열정을 훨씬 넘어서는 수준이었습니다. 저였다면 어땠을지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마 저는 TV 드라마 제작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늘 영화라는 더 큰 무대를 바라보면서, 영화 산업이 성장하고 이름 있는 감독들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비교하고 좌절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이재규 감독님은 달랐습니다. 영화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내려놓고, 정말로 TV 드라마라는 현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전념했던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드라마 제작 초기, 현장에서 스태프들의 텃세와 무시를 견디며 3년이라는 시간을 집요하게 버텨냈고, 그 과정에서 현장의 구석구석을 몸으로 익혔습니다. 이런 방식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누구보다 현장을 깊이 이해하는 연출자가 되었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의 완성도와 성공 확률을 끌어올리는 감각을 체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재규 감독님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부족한 재능이나 열정을 집요함으로 보완하려는 태도를 끊임없이 유지했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나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한 번의 시도가 기대만큼의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면 곧바로 "나는 이 길에 재능이 없는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리고 쉽게 물러서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진짜 성패를 가르는 것은 재능의 유무라기보다 그 자리를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집요하게 붙들고 있느냐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드라마 감독의 지위
영화는 감독의 이름이 하나의 브랜드처럼 남고, 때로는 그 이름만으로도 기대와 신뢰가 형성됩니다. 해외 영화제나 글로벌 시장에서 잘 알려진 유명한 영화감독이 될 수도 있고, 하나의 창작자로서 분명하게 기억됩니다. 반대로 드라마는 그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 같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먼저 회자되는 것은 작가의 이름인 경우가 많고, 감독은 그 뒤편 어딘가에서 전체를 조율하고 있음에도 상대적으로 덜 드러나는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남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에도, 그 이름이 관객의 기억 속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장르적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차이를 생각하면서 개인적으로도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좋아하는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 "이거 작가가 누구지?"라는 생각만 하고, 정작 감독이 누구인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적이 많았습니다. 반대로 영화는 이상하게도 감독 이름이 함께 따라붙는 경우가 많았는데, 예를 들어 한 번 인상 깊게 본 영화감독의 작품을 이후에 다시 고르게 되는 식으로 선택의 기준이 되곤 했습니다. 같은 영상 콘텐츠인데도 기억의 방식이 다르게 작동한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렇게 생각이 이어지고 나니, 이제는 드라마 감독님들의 이름을 좀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남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한 편의 재미있는 드라마로 소비하고 지나가기보다는, 그 뒤에서 전체의 호흡과 감정을 설계한 사람의 이름까지 함께 떠올릴 수 있어야 작품을 보는 경험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험이 만든 명장면
이재규 감독님의 최근 작품인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에서 정신질환을 시각화한 방식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읽다 보니 이런 생생한 묘사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재규 감독님 본인이 직접 이런 정신적 아픔을 겪어봤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황장애를 물이 차오르는 밀폐된 공간으로 표현하거나, 불안을 시각적 압박으로 형상화하는 방식은 추상적인 감정을 구체적인 체험으로 바꿔주는 장치였습니다.
저 역시 공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 지점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도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로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도 이런 고통을 겪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해왔기에 이런 상태가 된 걸까'라는 비교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이 병과 싸우고 있는 제 자신의 상황이 답답했습니다. 공황장애나 불안장애는 감기와 같은 질병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병들이 어떤 성취나 삶의 무게와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마음이 계속 올라왔습니다.
어쨌든, 이 감독님은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감정을 단순한 고통으로만 두지 않고, 타인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어 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일종의 회복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창작이 치료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공한 삶이라고 해서 고통이 제거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어떤 삶이든지 고통과 성취가 늘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공생하는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longblack.co/note/930?utm\_source=longblack\_search\_w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