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왓챠피디아 평점 4.1점. 숫자만 보면 무난한 작품처럼 느껴지지만, 직접 보고 나면 이게 단순히 '힐링 드라마'라는 말로 정리되는 작품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 틀었을 때 그냥 가볍게 보다 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예가가 시골 섬마을에 내려가 아이들과 어울린다는 설정이 너무 뻔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다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 《바라카몬》은 2023년 후지TV에서 방영된 작품으로, 서예라는 정적인 소재와 고토 열도라는 공간을 배경 삼아 한 인간이 조금씩 달라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재능 없으면 의미 없는 삶이라고 믿었던 저한테 이 드라마는 꽤 불편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섬마을이라는 공간
주인공 한다 세이슈는 저명한 서예가의 아들로, 본인 역시 천재 서예가로 명성을 쌓아가던 인물입니다. 그런 그가 자신의 글씨를 "교본을 그대로 베낀 것 같다"고 평한 미술관장의 멱살을 잡는 사건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권유로 나가사키 서쪽 끝, 고토 열도의 한 섬마을에 내려오게 됩니다.
여기서 고토 열도란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 서쪽에 위치한 군도로, 외딴 어촌 공동체 특유의 느린 리듬이 살아있는 곳입니다. 공항 앞에 택시 한 대 없고, 마을까지 걸어가면 네 시간이 걸리는 곳. 한다는 그 길을 뚜벅뚜벅 걷다 경운기를 얻어 타고, 빈집이라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절망합니다.
제가 이 초반부를 보면서 가장 공감한 장면은 따로 있습니다. 한다가 스마트폰도, 노트북도 폭풍우에 망가지자 갑자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는 대목이었습니다. 저도 낯선 환경에서 익숙한 도구를 잃으면 당장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공부는 오래 했지만 생활력은 형편없고, 그렇다고 전문지식이 특출나지도 않은 어정쩡함. 한다의 당황스러움이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를 변화시킨 건 서예 이론서도, 특별한 스승도 아니었습니다. 경운기를 태워준 할아버지, 집에 무단 침입해 트럼프를 치는 꼬마 나루, 방과 후 기지처럼 드나드는 중학생 언니들. 섬 사람들은 서예가 뭔지도 모르지만 고기를 잡고 이사를 돕고 이웃을 자연스럽게 이어 줍니다. 능력이라는 단어를 저는 너무 오랫동안 시험 성적이나 전문 기술 같은 좁은 기준으로만 생각해 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이 장면들을 보면서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 고토 열도: 나가사키현 서쪽 군도. 드라마의 실제 촬영 배경이자 한다가 변화하는 공간
- 한다의 고립: 문명의 도구(스마트폰·노트북)를 잃자마자 무력해지는 도시인의 민낯
- 섬 사람들의 공동체성: 서예는 몰라도 사람을 돌보는 방식을 아는 이들
재능과 평범함 사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제가 가장 오래 머문 인물은 의외로 한다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과목 성적이 고르게 평범해서 '평범 씨'라는 별명을 달고 사는 중학생 히로시였습니다.
히로시는 한다의 방 안에 붓글씨 종이가 빼곡하게 가득 찬 것을 보고 혼자 조용히 멈춥니다. 나루가 "선생님이 정말 재능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쓰고도 만족 못 할 리 있냐"고 말하는 순간, 히로시는 살면서 무언가를 그렇게 진심으로 해본 적이 없는 자신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표정이 이상하리만큼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노력하는 것도 재능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실패해도 같은 자리로 돌아와 몇 년이고 같은 일을 반복합니다. 저는 솔직히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든 적당히 흥미를 느끼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고, 그러다 보니 '노력할 수 있는 재능조차 부족한 사람 아닐까'라는 생각을 꽤 오래 했습니다.
여기서 드라마가 흥미로운 지점은, 히로시의 고민에 정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천재 서예가의 재능충(才能充), 즉 특정 분야에서 압도적인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라는 설정이 한다에게 붙어 있지만, 정작 드라마는 그 재능을 부러워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 않습니다. 재능충이란 쉽게 말해 노력 없이도 탁월한 결과를 내는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인데, 드라마 속 한다는 오히려 그 재능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부족하다는 평을 듣습니다.
재능에 대해 엇갈린 시각이 존재합니다. 재능이 있어야 의미 있는 창작이 가능하다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그 생각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재능이 있어도 삶이 비어 있으면 결국 교본 같은 글씨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한다의 이야기는 조용히 보여 줍니다. 출처: NHK문화방송 서예 관련 아카이브에서도 서예는 기술 습득(技術 習得)만큼이나 내면의 수양(內面 修養)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데, 드라마는 그 사실을 섬마을 일상이라는 방식으로 증명합니다.
성장과 삶
한다가 섬에 내려온 뒤 처음으로 자신의 글씨에서 무언가를 느끼는 순간은, 더 많은 서예 이론을 공부한 뒤가 아닙니다. 나루가 방파제 벽 위로 끌고 올라가 억지로 보여준 석양 노을 앞에서였습니다. 그 황홀한 저녁놀을 마음에 담고 집으로 돌아온 한다는 홀린 듯 커다란 붓을 들고 단 한 글자, '락(樂)', 즉 즐거울 락을 써 내려갑니다.
여기서 락(樂)이란 단순히 즐거움을 뜻하는 한자가 아닙니다. 서예의 맥락에서 이 글자는 필획(筆劃), 즉 붓의 획 하나하나에 감정과 삶의 무게가 실려야 비로소 살아있는 글씨가 된다는 의미를 상징합니다. 한다는 섬에 오기 전까지 글씨를 잘 쓰려 했지만, 섬에서의 경험 이후 처음으로 그냥 쓰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직접 체감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저는 예전에 좋은 글을 쓰려면 자료를 더 찾고 책상 앞에 더 오래 앉아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는 조금 달리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글은 지식보다 경험에서 나오는 경우가 더 많고, 그 경험은 결국 사람을 만나고 일상을 살아보는 데서 온다는 것. 창작자에게 몰입(沒入)이 중요하다고 많이들 말하는데, 여기서 몰입이란 단순히 오래 앉아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를 소재로 끌어들이는 감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 드라마가 아무 갈등 없이 해피엔딩으로만 흐르는 작품은 아닙니다. 한다가 혼신을 다해 쓴 '락(樂)'은 서예전에서 2위에 그쳤고, 대상은 18살 신인이 가져갑니다. 성장했다고 해서 곧바로 결과가 따라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드라마는 솔직하게 보여 줍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오히려 더 신뢰가 갔습니다. 섬에 왔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바라카몬 원작 만화랑 드라마가 많이 다른가요?
A. 요시노 사츠키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큰 줄기는 동일합니다. 다만 드라마는 실제 고토 열도에서 촬영해 영상미를 훨씬 살렸고, 배우들의 연기로 나루의 천진함이 더 직접적으로 전달된다는 의견이 많습니다. 원작 팬이라도 드라마 특유의 질감이 따로 있어 충분히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Q. 힐링 드라마라고 해서 갈등이 거의 없는 편인가요?
A. 힐링 드라마라서 가볍게만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한다가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고, 나루에게 모진 말을 쏟아붓고, 서예전에서도 대상을 놓치는 등 꽤 현실적인 좌절이 이어집니다. 다만 그 갈등을 섬마을의 여유로운 일상이 조용히 품어 준다는 점에서 힐링이라는 표현이 맞는 것 같습니다.
Q. 서예를 전혀 몰라도 재미있게 볼 수 있나요?
A. 제가 직접 봤는데, 서예 지식이 전혀 없어도 전혀 문제없었습니다. 드라마의 중심은 서예 기술보다 한다라는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서예라는 낯선 소재가 주는 고요한 분위기 자체가 드라마의 매력 중 하나라는 의견도 많습니다.
Q. 나루 역할 배우는 누구인가요?
A. 나루 역은 아역 배우 코토네 히로나가 맡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이 드라마의 실질적인 중심축은 한다보다 나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이 특유의 직설적인 말 한마디가 드라마 전체의 온도를 결정합니다.
결론
《바라카몬》을 다 보고 나서 제게 남은 것은 감동적인 장면보다 하나의 질문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재능이 없으면 삶도 실패한 것이라는 기준으로만 나 자신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 이 드라마는 그 질문에 정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재능보다 먼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저는 이 작품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결과에만 집중하느라 지쳐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 이 드라마를 권하고 싶습니다. 특별한 재능보다 평범한 하루를 살아내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과정 속에서 창작도, 인생도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이 드라마는 조용하고 따뜻하게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