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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으로 시작한 관계가 진짜가 될 수 있다는 걸 믿으시나요? 저는 솔직히 오래 의심했습니다. 《작골》을 보기 전까지는요. 정략결혼으로 왕부에 들어간 여주인공의 이야기가 왜 이렇게 마음에 걸렸는지, 보고 나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계약결혼이라는 설정, 왜 자꾸 피하게 됐나
계약결혼은 중국 고장극에서 정말 자주 쓰이는 서사 장치입니다. 여기서 고장극이란 중국의 역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 시대극 장르를 말하는데, 권력 다툼과 혼인 정략이 맞물리는 구조 덕분에 계약결혼 설정이 자연스럽게 반복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설정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나중에 좋아하게 될 거 다 아는데, 왜 처음에 그렇게 서로 밀어내야 하냐는 생각이었거든요.
근데 《작골》을 보다가 조금 다른 걸 느꼈습니다. 두 사람이 차갑게 구는 건 단순히 설정상의 긴장감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진짜 자신을 숨겨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방탕하고 폭력적이라 소문난 세자 소무이와, 고분고분한 명문가 아가씨처럼 행세해야 하는 사가어. 두 사람 모두 '가면'을 써야 하는 처지였고, 그게 오히려 관계의 출발점을 더 흥미롭게 만들었습니다.
계약결혼이라는 구조가 작동하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이건 단순한 로맨스 장치가 아닙니다.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두 사람이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하는 상황, 즉 극도의 긴장 속에서 상대방을 가장 많이 관찰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서로를 빠르게, 깊이 알아가는 아이러니가 생깁니다.
정체 숨기기, 생각보다 피곤한 일
《작골》에서 제가 계속 눈에 밟혔던 건 사가어가 기관술을 숨기고 사는 부분이었습니다. 기관술이란 기계나 장치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기술을 말하는데, 드라마 속에서 이건 그녀의 가장 진짜 재능이자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걸 숨기기 위해 신분까지 위장하며 살아갑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인데, 어느 순간 진짜 애정을 갖고 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엔 분명 계약이었고, 시간 때우고 돈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만둘 때 이상하게 아쉬웠습니다. 계약이라고 생각했던 것에 진심이 들어있었던 거겠죠.
밖에서는 정리 잘하고 계획적인 사람처럼 보이려고 하는데, 사실 집에서는 아무 계획 없이 하나만 붙잡고 파는 사람입니다. 그 괴리가 생각보다 꽤 피곤합니다. 하루 몇 시간 그렇게 사는 것도 지치는데, 사가어처럼 이름과 신분을 통째로 숨기고 사는 건 어떤 느낌일까 싶었습니다.
페르소나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페르소나란 심리학에서 타인에게 보여주는 사회적 얼굴을 뜻하는데,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페르소나를 씁니다. 문제는 그게 두꺼워질수록, 진짜 자신이 어디 있는지 점점 모르게 된다는 겁니다. 사가어가 들켰을 때 오히려 더 편해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저한테는 단순한 로맨스 장면이 아니라 해방 같은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드라마에서 정체 숨기기가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 숨기는 행위 자체가 캐릭터의 내면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 들킬 위기가 반복되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집니다
- 결국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 관계의 전환점이 됩니다
이 드라마가 위로가 된 이유
솔직히 저는 이 드라마를 처음에 그냥 시간 때우려고 틀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멈추지 못하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특히 숨기고 있던 걸 상대방이 먼저 알아봐 주는 장면들에서 계속 마음이 걸렸습니다.
저도 남들 앞에서 잘 꺼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거나, 남들이 이해 못 할 것 같아서 그냥 혼자 있을 때만 붙잡고 있는 것들입니다. 근데 드라마에서는 그걸 들켜도 괜찮았던 장면들이 계속 나옵니다.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진짜 관계가 시작되는 구조였습니다.
공감 서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기서 공감 서사란 시청자가 인물의 감정 경로를 따라가며 자신의 경험을 겹쳐보는 방식의 이야기 구조를 말하는데, 《작골》은 그게 잘 작동하는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냉혹한 장군처럼 멋지게 위기를 넘길 일은 없겠지만, 숨기고 있던 걸 누군가 알아봐 주는 그 순간의 마음은 아마 비슷할 것 같습니다.
드라마 시청에 관한 심리 연구들을 보면, 사람들이 픽션에 몰입하는 주된 이유 중 하나는 현실에서 하기 어려운 감정 경험을 안전하게 해 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출처: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작골》이 저한테 그런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계약결혼 설정을 좋아하지 않으셨다면, 이 드라마를 한 번쯤 다시 볼 이유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정체를 숨기고 사는 사람의 불안한 감정선이 공감이 된다면,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 한 가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제가 숨기고 있는 걸 누가 먼저 알아봐 줬으면 좋겠다고요. 아마 그 바람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만든 이유였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