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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를 받으면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믿었던 사람 중 하나였고, 박사과정까지 공부하고 나서야 그 믿음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알게 됐습니다. 드라마 《찬여번성》 속 심리학 박사 출신 주인공을 보며, 그 허무함이 다시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박사학위가 남긴 것 — 종이 한 장
일반적으로 학위는 능력의 증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학위를 받고 나서 처음 든 감정은 해방감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제 어떻게 하지?"라는 막막함에 가까웠습니다. 학교 안에 있을 때는 다음 단계가 항상 정해져 있었습니다. 시험을 잘 보면 다음 학년으로, 졸업하면 더 높은 과정으로. 그 구조 안에서는 잘하는 것과 나아가는 것이 같은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받는 순간, 그 구조가 끝납니다. 더 이상 다음 단계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효능감, 즉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동안 외부 시스템에 의존해 있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자기효능감이란 Albert Bandura가 제안한 개념으로, 특정 과제를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개인의 내적 확신을 뜻합니다. 학위 과정 내내 그 확신이 성적과 평가로 채워졌던 셈인데, 그 채널이 막히자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흔들렸습니다.
벽에 걸면 종이 한 장이고, 이력서에 적으면 몇 글자. 그 종이가 하루를 대신 살아주지는 않습니다. 이건 제가 직접 겪고 나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사실입니다.
잘하는 것과 살아가는 것 — 완전히 다른 능력
교육심리학에서는 학업 성취와 삶의 만족도 사이의 상관관계가 생각보다 낮다는 연구 결과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OECD 교육지표 보고서에 따르면 고학력자의 고용률과 소득 수준은 상대적으로 높지만, 주관적 행복도와의 연관성은 훨씬 약한 것으로 나타납니다(출처: OECD Education at a Glance). 수치가 이렇다면, 오래 공부한다고 삶을 잘 살게 되는 건 아니라는 결론은 이미 꽤 검증된 셈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공부를 오래 하면 적어도 삶의 방향 정도는 잡히겠지 싶었으니까요.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박사학위가 있다고 앞으로 뭘 하며 살아야 하는지 아는 게 아니었고, 대단한 사람이 된 것도, 돈을 잘 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가끔은 학위 없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정확히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알고 그걸로 삶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이요. 이게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의 차이에서 비롯됩니다. 여기서 내적 동기란 외부의 보상이나 평가가 아니라 활동 자체에서 오는 흥미와 만족을 의미합니다. 저는 오래 공부하는 동안 외적 동기, 그러니까 성적·학위·인정에 의존해 왔고, 내적 동기를 찾는 연습은 충분히 하지 못했습니다.
드라마 속 아이들이 축구공을 쫓아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는 장면이 유독 마음에 걸렸던 것도 그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잘하는 것보다 하고 싶은 것에 먼저 몸이 반응했습니다. 저는 그 순서가 평생 반대였던 것 같습니다.
이 허무함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렇다면 학위가 무의미한가. 그건 또 아닙니다. 허무함을 느끼는 것과 의미가 없다는 건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허무함은 학위가 잘못된 게 아니라, 학위에 과도한 기대를 걸었던 데서 온 것이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기대 불일치 이론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기대 불일치란 사전에 형성된 기대와 실제 경험 사이의 간극이 감정적 반응을 결정한다는 개념입니다. 기대가 클수록 그 간극도 크고, 실망도 깊어집니다. 학위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않고 막연히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던 게 문제의 본질이었습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체육 기자재 관리원으로 일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 자리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관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학위는 능력의 일부를 증명하지만, 삶 전체를 설계해주지는 않습니다.
- 지금 하는 일이 초라해 보여도, 그것이 인생의 실패를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찾는 연습은 학위와 별개로, 지금 이 순간에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 세 가지를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받아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저도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더 믿어보기로 합니다.
학위 하나로 인생이 완성되는 게 아니듯,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잘하는 것이 많아도 살아가는 방향을 모를 수 있고, 지금 하는 일이 작아 보여도 그 안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드라마가 스포츠 성장물이면서도 자꾸 마음에 걸리는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습니다. 뭘 향해 뛰는지 아는 사람이, 결국 오래 뜁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qVF9FRubHKw
https://www.oecd.org/education/education-at-a-gl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