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서류를 넣었는데 연락이 없었던 적, 한 번쯤 있으시지 않습니까? 저는 경력 공백이 생긴 후 재취업을 시도하면서 이게 제 문제인지, 아니면 구조적인 문제인지 한참을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잔혹한 인턴>이 처음 시작됐을 때 손이 저절로 리모컨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보다 보니 공감보다 위화감이 더 쌓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시작은 공감
혹시 "경력 단절"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괜히 마음이 움츠러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결혼이나 육아가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었지만, 공백이 생긴 이후부터 서류 탈락이 당연한 일처럼 반복됐습니다. 그래서 드라마 주인공 고해라가 면접장에서 "7년 동안 도태되셨을 거고 우리가 왜 당신을 뽑아야 하느냐"는 말을 들을 때, 화면을 보면서 눈을 피하게 됐습니다.
경력 단절(Career Break)이란 취업 상태에 있다가 여러 사유로 노동 시장을 일시적으로 이탈한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일을 하다가 어떤 이유로든 그 흐름이 끊긴 것입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3년 기준 경력단절여성은 약 134만 명에 달하며, 주된 사유는 결혼·육아·임신·출산 순으로 나타났습니다(출처: 통계청). 숫자로 보면 어마어마하지만, 막상 그중 한 명이 되면 그 숫자가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제가 직접 겪어봐서 압니다.
드라마 초반, 해라가 수십 번의 서류 탈락과 면접 탈락을 반복하는 장면은 제 경험과 꽤 맞닿아 있었습니다. 눈을 낮춰도 안 되고, 눈을 높여도 안 되는 그 기묘한 경계에 끼는 느낌. "왜 이런 경력의 사람이 여기에?"라는 면접관의 눈빛도 실제로 존재한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만큼은 드라마가 꽤 정확하게 포착했다고 생각합니다.
- 경력 단절 이후 재취업 시도 시 1차 서류 탈락률이 매우 높음
- 눈높이를 지나치게 낮추면 오히려 "왜 여기에?"라는 의심을 사는 역설
- 드라마 초반의 면접 묘사는 현실의 구직 감각과 실제로 겹치는 지점이 존재
현실성이 흔들리다
그런데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공감이 잘 되던 드라마가 어느 순간부터 제 일상과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해라가 인턴으로 입사하게 되는 경로를 보셨습니까? 전 직장 동기였던 최지원이 상품기획실 실장으로 있었고, 그녀가 직접 인턴 TO(채용 인원)를 열어서 해라를 연결해 줬습니다. TO란 특정 직책이나 직급에 배정된 채용 가능 인원을 뜻합니다. 쉽게 말해, 자리가 생겼을 때 누군가를 "꽂아 넣을 수 있는 구조"가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첫 번째 의문이 생겼습니다. 경력이 단절되고 집에 오래 있다 보면 직업적 인적 네트워크(Professional Network)도 자연스럽게 좁아지기 마련입니다. 인적 네트워크란 직업적 맥락에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인간관계의 총체를 말합니다. 10년 가까이 연락이 끊겼던 전 직장 동기가 갑자기 나타나 "우리 팀 인턴 자리 하나 있는데 어때?"라고 제안해 주는 상황이, 현실에서 과연 몇 명에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오히려 예전 인맥에게 먼저 연락하기가 더 어려워집니다. "나 잘 지내고 있어"라는 말을 꺼내기 민망한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나 지금 힘들어, 도와줘"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드라마는 이 부분을 너무 매끄럽게 넘어갑니다. 나중에는 부사장의 조카이자 잘생긴 경영지원팀 실장까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점점 드라마틱한 방향으로 흘러갔고, 저는 그 지점부터 몰입이 식었습니다.
워킹맘(Working Mom)이라는 단어는 드라마 전반에 걸쳐 핵심 키워드로 등장합니다. 워킹맘이란 직장 생활과 육아를 병행하는 어머니를 가리키며, 이 드라마는 그들이 겪는 구조적 차별과 심리적 부담을 꽤 구체적으로 묘사하려 했습니다. 임신 포기 각서, 휴직 유도, 대체 인력 문제 등은 실제로 한국 직장 내 모성 보호 침해 사례로 빈번하게 보고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출처: 고용노동부). 이 부분은 드라마가 진지하게 짚어낸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워킹맘과 유리천장
그렇다면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라미란 배우 때문이었습니다. 해라가 인턴으로 들어가서 복사기 앞에서 어색하게 웃는 장면, 후배였던 소재섭에게 "편하게 인턴으로 대해 주세요"라고 직접 말하는 장면은 배우가 살려낸 장면이었지 설정이 만들어준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직접 봤는데, 그 장면들만큼은 '아, 이 사람 진짜 저런 감정 알겠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드라마가 내세우는 핵심 메시지는 유리천장(Glass Ceiling), 즉 여성이나 소수자가 조직 내에서 일정 직위 이상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유리천장이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승진·채용 상의 구조적 불평등을 의미합니다. 이 드라마는 그 장벽이 때로는 같은 여성에 의해서도 작동된다는 점을 최지원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려 했고, 그 시도 자체는 의미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제 경험상 이건 좀 아쉬웠습니다. 해라가 결국 정규직 전환이라는 결말에 도달하는 과정이, 개인의 역량보다 상황의 흐름에 더 의존하는 구조처럼 보였습니다. 해라가 길에서 쓰러진 사람을 구한 영상이 조회수 천만을 기록하고, 그것이 마케팅 소재가 되어 회사로 복귀하는 흐름은 드라마적으로는 깔끔하지만, 현실의 경력단절 여성들에게는 "그러니까 결국 운이 따라야 한다는 거잖아"라는 씁쓸한 독해도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드라마가 금소진 과장의 육아휴직 결정과 번복, 이문정 대리의 조산과 퇴사, 지원이 홀로 감당해야 했던 임신 경험 등 개별 캐릭터들의 서사를 꽤 촘촘하게 쌓아 올렸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직장 내 모성 보호(Maternity Protection at Work)란 임신·출산·육아를 이유로 한 불이익을 방지하고 여성 근로자의 고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뜻합니다. 그 제도가 현장에서 얼마나 형식적으로 작동하는지를 이 드라마는 꽤 잘 보여줬습니다.
정리하면, 잔혹한 인턴은 제가 초반에 기대했던 것과 후반에 실제로 본 것이 꽤 달랐던 드라마입니다. 경력 단절 이후 재취업을 시도하는 과정의 감정선, 직장 내 워킹맘을 향한 차별 구조, 같은 여성 사이에서도 벌어지는 권력관계 같은 소재는 이 드라마가 진지하게 다루려 한 흔적이 느껴졌습니다. 그 의도 자체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재취업 문턱을 실제로 두드려본 분이라면, 중반 이후의 전개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저처럼요. 그래도 라미란 배우의 연기만큼은 끝까지 볼 이유가 됐습니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분이라면 한 번쯤 보시되, 너무 현실적인 해법을 기대하지는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전체 에피소드는 티빙에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