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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한국 드라마가 넷플릭스를 휩쓸고 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막연히 '제작사들도 잘 되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나서야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알았습니다. 글로벌 흥행작을 만들어도 정작 제작사에 돌아오는 몫은 생각보다 훨씬 작다는 것, 그리고 그 구조가 넷플릭스 이전에도 이미 존재했다는 사실이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글로벌 흥행과 초라한 수익
「더 글로리」가 넷플릭스 비영어권 역대 5위를 기록했을 때, 저도 그 드라마를 정주행하면서 '이 정도면 제작사가 대박 났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업계 추정에 따르면 이 작품 하나로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이 손에 쥔 이익은 100억 원이 채 안 된다고 합니다. 넷플릭스 역대 시청 1위를 지키는 「오징어 게임」의 제작사 싸이런픽쳐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작비 253억 원을 받고 그중 40억 원 남짓을 순수익으로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넷플릭스가 같은 작품으로 벌어들인 약 1조 2000억 원과 비교하면 숫자가 말을 잃게 만듭니다.
이 구조의 핵심에는 IP(Intellectual Property right), 즉 지식재산권 계약이 있습니다. IP란 드라마, 음악, 캐릭터처럼 창작 활동에서 생겨난 무형의 권리를 말합니다. IP를 보유한 쪽이 2차 저작물, 리메이크, 굿즈 등 파생 수익 전체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넷플릭스는 제작비 전액을 지원하는 대신 이 IP를 가져가고, 제작사에는 제작비의 약 10%를 수익으로 보장하는 구조입니다. 드라마가 얼마나 터지든, 제작사 입장에서 추가로 돌아오는 몫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글을 읽으면서 가장 눈여겨본 부분이 있었습니다. 넷플릭스 이전에도 이미 방송국이 IP를 가져가는 구조가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방송국이 제작비의 70~80%를 대주는 대신 IP를 확보했고, 제작사는 나머지 비용을 광고 협찬으로 메웠습니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 방송국 지원이 절반 이하로 줄어 적자를 보는 일도 있었습니다. 즉, 제작사는 플랫폼이 방송국이든 OTT든 오랫동안 '을'이었던 셈입니다.
- 스튜디오드래곤 2022년 영업이익률: 약 9.3% (매출 6979억원, 영업이익 652억원)
- 같은 해 하이브 영업이익: 2377억원으로 스튜디오드래곤 대비 약 3.6배
-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 수익 추정치: 약 1조 2000억원 vs. 제작사 순수익 약 40억원
제작사의 IP 전략
제가 이 문제를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사례는 에이스토리였습니다. 이 제작사는 2019년 한국 최초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킹덤」을 만들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넷플릭스 한국 유료 이용자가 6개월 만에 약 90만 명에서 184만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뛰었다는 분석이 나올 정도였습니다(출처: 와이즈앱·와이즈리테일). 그런데 에이스토리가 그 기간에 남긴 영업이익은 고작 1억 1200만 원 수준이었습니다. 드라마가 대박 났는데 회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 이 회사 대표는 그때를 계기로 결심을 굳혔다고 합니다.
그 이후 에이스토리는 IP 확보를 핵심 전략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넷플릭스가 오리지널 콘텐츠로 제작하자고 먼저 제안했지만, 에이스토리는 그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대신 국내 방영권은 ENA에, 해외 방영권은 넷플릭스에 파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오리지널 계약과 방영권 판매의 차이가 뭐냐고 하실 수 있는데, 방영권(라이선싱)이란 콘텐츠 자체의 소유권을 넘기지 않고 일정 기간 상영할 권리만 판매하는 계약입니다. IP를 유지하기 때문에 흥행할수록 추가 수익이 제작사에 돌아오고, 2차 저작물 권리도 그대로 남게 됩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우영우」는 넷플릭스에서 9주 연속 비영어 프로그램 1위를 기록했고, 미국 제작사와 리메이크 계약도 추진됐습니다. 관련 웹툰, 뮤지컬 등 2차 저작물에서 나오는 수익은 전부 에이스토리 몫이 됐습니다. 2022년 에이스토리는 역대 최고인 717억 원 매출에 영업이익률 11%대를 기록했습니다. 「킹덤」을 방영하던 시절 3% 미만이었던 수치와 비교하면, IP를 지키는 전략이 어떤 의미인지 숫자로 증명된 셈입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단순히 '잘 됐다'는 생각이 아니라, 바로 눈앞의 확실한 이득을 포기하고 멀리 보는 선택을 스스로 했다는 점이 훨씬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제삼자가 만들어준 기회가 아니라, 제작사 스스로 협상 구조를 바꾼 것이니까요.
「무빙」을 공동 제작한 미스터로맨스의 전략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 제작사는 강풀 작가의 웹툰 IP를 중심으로 「조명가게」, 「브릿지」, 「아파트」 등 여러 작품을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묶어 시즌제로 확장하는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마치 마블이 스탠 리의 만화들을 엮어 「어벤져스」라는 프랜차이즈를 만든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세계관이 연결되면 팬덤이 쌓이고, 팬덤이 쌓이면 플랫폼은 그 콘텐츠를 놓칠 수 없게 됩니다. 협상력이 자연스럽게 제작사로 이동하는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협상력이 경쟁력이다
드라마 유통 시장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점도 제작사 입장에서는 반가운 신호입니다. FAST(Free Ad-supported Streaming TV)라는 새로운 유통 채널이 해외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데, 이는 광고를 보는 대신 구독료 없이 무료로 영상을 시청할 수 있는 스트리밍 서비스를 말합니다. 케이블 TV의 채널 서핑과 VOD의 주문형 시청을 합친 형태로, 스마트 TV 앱으로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폭스의 투비(Tubi), 파라마운트의 플루토 TV, 로쿠의 더 로쿠 채널이 대표적이며, 투비의 경우 월간 활성 이용자 수가 6400만 명에 달합니다.
FAST 플랫폼들도 자체 오리지널 콘텐츠를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존의 FAST 서비스인 프리비(Freevee)가 제작한 법정 시트콤 「쥬리 듀티(Jury Duty)」는 에미상 4개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출처: 에미상 공식 사이트). 넷플릭스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글로벌 스트리밍 시장에 다양한 경쟁자가 등장할수록, 이들이 K드라마를 확보하기 위해 더 좋은 조건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정부 차원의 지원도 변수입니다. 「재벌집 막내아들」의 공동 제작사 래몽래인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제작비 352억 원의 상당 부분을 자체 조달하고, 드라마 IP의 50%를 확보했습니다. 2023년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영상 콘텐츠 제작 비용에 대해 중소 제작사는 최대 30%까지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게 됐습니다. 세액공제란 납부해야 할 세금 자체를 직접 줄여주는 제도로, 제작 투자 부담을 줄이고 자체 IP 확보 여력을 높이는 데 의미 있는 지원입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이것입니다. 정부 지원이나 FAST 등장이 외부 환경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된다 해도, 결국 제작사가 스스로 협상력을 키우는 과정이 없으면 근본적인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방송국이 IP를 쥐고 있던 시대에서 OTT가 IP를 쥐는 시대로 넘어왔을 때, 상대가 바뀌었을 뿐 제작사의 위치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진짜 변화는 에이스토리처럼 제작사 스스로 계약 구조를 다시 설계하고, 단기 수익보다 장기 IP 가치를 선택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 FAST: 구독료 없이 광고 기반으로 운영되는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 대항마로 급성장 중
- 세액공제: 납부 세금을 직접 줄이는 제도. 중소 제작사 기준 최대 30% 적용
- 시즌제 세계관 전략: 연결된 IP로 팬덤을 축적해 플랫폼과의 협상력을 구조적으로 높이는 방식
K드라마가 세계 시장을 흔들고 있지만, 그 과실이 제작사에 제대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분명 불편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이야기가 단순히 넷플릭스를 비판하는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으면 합니다. 진짜 핵심은 제작사가 단순한 콘텐츠 공급자를 넘어, IP를 축적하고 스스로 협상력을 가진 기업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워너브라더스나 디즈니가 수십 년에 걸쳐 IP를 쌓고 그것을 프랜차이즈로 키워온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로를 걷는 제작사가 많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지금 에이스토리나 미스터로맨스가 보여주는 방향이 그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권리를 나 스스로 지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요.
참고: https://longblack.co/note/849?utm_source=longblack_search_w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