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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년이(배우들의 준비, 문옥경, 국극)

tigermorning 2026. 7. 2. 18:06

목차


    드라마 '정년이'와 웹툰 '정년이' 포스터

     

    드라마 '정년이'가 방영될 당시, 저는 '정년이'를 제가 만든 것도 아닌데 한국 친구들 뿐만 아니라 해외의 친구들에게까지 "이게 넷플릭스에 올라오면 꼭 봐야한다"고 신신당부를 하면서 '정년이' 마케팅에 열을 올렸습니다. 이 드라마는 당시 시청률 13.4%를 기록하며, "우리나라 사람 모두가 봐야한다"며 열광했던 저의 기대에는 못미쳤지만, 그래도 흥행에 성공했고 사람들 입에 많이 오르내렸습니다. 더욱이 이 드라마는 남자 주인공 한 명 없이, 생소한 국극이라는 소재만으로 흥행에 성공하면서,  오랜만에 공중파 드라마의 흥행 공식을 깼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솔직히 뿌듯하면서도 얼떨떨했습니다. 배우들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배우들의 국극을 재현한 수준이 단순히 "잘 따라했다"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배우들의 철저한 준비

    드라마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된 건 주연 김태리 배우가 약 3년간 판소리를 배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전라도 지방에 직접 내려가 소리를 익혔다는 이야기는 제작 발표 때부터 돌았죠. 그런데 막상 드라마를 보고 나서 느낀 건, 김태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제가 직접 드라마를 보면서 놀란 건, 실제 무대 공연을 4~5회 통으로 촬영했다는 대목이었습니다. 편집으로 잘라 붙인 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공연처럼 찍었다는 뜻입니다.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는 드라마는 조금만 어설프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데, '정년이'는 그 함정을 완벽히 피해 갔습니다.

    여기서 국극이란 국악을 기반으로 한 한국 전통 뮤지컬 형식의 연극을 말합니다. 판소리의 발성법과 창법, 무속 음악의 요소가 혼합된 장르로, 일반 뮤지컬과는 발성 자체가 다릅니다. 쉽게 말해, 성악과 판소리 사이 어딘가에 있는 발성을 연기하면서 동시에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걸 배우들이 해냈다는 게 저는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은 어떤 역할이든 결국 "따라하는 것"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는 그 말이 얼마나 과소평가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저는 제 전문 분야에서 이만큼 매달려본 적이 있나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솔직히 좀 부끄러웠습니다.

    • 김태리: 약 3년간 전라도에서 판소리 집중 수련
    • 출연 배우 전원: 실제 국극 창법과 동작을 소화
    • 촬영 방식: 실제 무대 공연 형태로 4~5회 통 촬영 진행
    요약: 김태리를 포함한 출연 배우 전원이 국극 창법을 실제로 익혀 무대 공연 형식으로 촬영했으며, 그 수준이 단순한 모사를 넘어섰다는 점이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차별점입니다.

    문옥경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수혜자는 문옥경 역을 맡은 정은채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정은채 배우를 예전부터 눈여겨봤는데 왜 이렇게 안 뜨지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이 배우한테 필요한 건 남장이었구나, 하고요.

    문옥경 캐릭터는 실제 1950년대 여성 국극의 최고 스타였던 조금앵 배우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금앵은 당시 사생팬이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으며, 한 여성 팬이 너무 흠모한 나머지 조금앵과 가상 결혼식까지 올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여성 국극 배우들이 무대 밖에서도 남자 역할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유지했다는 점 역시 실제 기록에 근거한 묘사입니다.

    드라마 속 문옥경도 쓰리피스 수트를 즐겨 입고, 평소에도 남성적인 언행을 이어갑니다. 이 설정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건 정은채 배우의 체형과 분위기가 그 캐릭터와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1화부터 다시 봤는데, 처음 등장 장면부터 이미 압도적이었습니다.

    원작 웹툰에서 문옥경은 비중이 크지 않은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드라마에서도 그 한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후반부에 비중이 줄어드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시청자들의 반응이 아무리 좋아도 원작의 서사 구조를 흔들지 않았다는 점은, 보기에 따라선 아쉽지만 제작진의 뚝심 있는 결단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요약: 문옥경은 실존 국극 배우 조금앵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로, 정은채 배우의 존재감이 이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의 빈자리를 완전히 대체했습니다.

    국극

    드라마 '정년이'의 배경이 된 1950년대 여성 국극은 6.25 전쟁 직후 한국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었다고 합니다.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시기에, 화려한 무대 위의 이야기는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기능을 했죠. 실제로 국극은 6.25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며 당대 관객들의 감정을 직접 건드렸습니다(출처: 국립민속박물관).

    또, '정년이' 원작 만화 작가가 배우들 간의 경쟁과 수직적 문화를 묘사하는 데 참고했다고 밝힌 일본의 다카라즈카 가극단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습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1914년 창단되었으며, 우리나라 국극단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여성 전용 뮤지컬 극단으로, 배우 지망생들이 어릴 때부터 입단해 극도로 경쟁적인 환경에서 훈련받는 곳입니다. 다카라즈카 가극단은 우리의 국극과 달리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있나 봅니다. 그러다 2023년, 단원 아리아 키이가 선배들로부터 지속적인 집단 괴롭힘을 당하다 세상을 떠난 사건이 알려지며 전 세계적으로 공분을 샀다고 합니다.

    이마에 고데기를 갖다 댄 선배, "후배들이 실수한 것도 네 탓"이라는 폭언. 이런 일이 무대 위의 아름다움 뒤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화려한 공연이라는 장르 자체가 품고 있는 어두운 이면을 보여줍니다. '정년이'에서는 초록이라는 연습생과의 사소한 갈등 정도로 이 부분을 순화해서 다루고 있지만, 실제 극단 문화는 그보다 훨씬 복잡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여성 국극은 1950년대 후반 텔레비전과 라디오 연속극이 대중화되면서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영상과 국극을 결합한 이중 연쇄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했지만, 대세를 거스르지는 못했습니다. 이중 연쇄극이란 영화 상영 전후로 무대 공연을 함께 선보이는 혼합형 공연 방식입니다. 드라마 후반부에서 정년이가 텔레비전의 가능성을 보고 이를 국극에 접목하려 할 가능성은 이런 역사적 맥락과 맞닿아 있습니다(출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요약: 여성 국극은 전후 대중의 위안이었지만, 극단 내부의 수직적 문화와 경쟁의 그늘이 공존했으며, 1950년대 후반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급격한 쇠퇴를 맞았습니다.

    정년이 vs 영서

    드라마에서 제가 가장 흥미롭게 본 구조는 정년이와 허영서의 대비입니다. 처음에는 '더 글로리'의 신예은 배우가 또 악역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주인공의 라이벌이라는 포지션이 그렇게 쓰이는 경우가 많았으니까요. 그런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정년이는 천재적인 음감과 무대를 즐기는 본능이 있지만, 앙상블이라는 개념을 아직 이해하지 못합니다. 앙상블이란 음악이나 연극에서 개별 연주자나 배우가 아닌 전체의 조화를 우선으로 하는 방식입니다. 자명고 무대에서 과한 군졸 연기를 선보이고 즉흥으로 노래까지 부른 정년이의 실수는, 재능 있는 초심자가 가장 흔히 저지르는 바로 그 실수였습니다. 자신의 빛남에 집중하다 전체를 놓치는 것. 강소복 단장의 "넌 내일부터 무대에 설 수 없다"는 대사는 그래서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가르침이었습니다.

    반면 영서는 완벽주의자입니다. 준비되지 않으면 연구생에게도 자신의 연기를 보여주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통제하는 스타일입니다. 기술적으로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문옥경에게 "연기를 즐겨라"는 충고를 듣는 장면에서 이 캐릭터의 한계가 드러납니다. 제 경험상, 너무 잘하려는 사람이 오히려 무대에서 경직되는 경우가 있는데, 영서가 딱 그 케이스입니다.

    두 사람은 각자가 부족한 것을 상대에게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정년이는 체계를, 영서는 즐기는 법을. 이 구조가 단순한 선악 대립이 아니라는 점이 드라마를 더 입체적으로 만드는 핵심입니다. 엄마에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영서가 감정 표현에 서툰 것도, 그 캐릭터를 악역으로 단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 윤정년: 천재적 음감, 즉흥성, 앙상블 감각 미숙 → 영서에게서 체계를 배울 것
    • 허영서: 기술적 완벽주의, 감정 통제 과잉, 무대를 즐기지 못함 → 정년에게서 즐김을 배울 것
    • 문옥경: 두 사람 모두에게 국극의 본질을 가르치는 매개자 역할
    요약: 정년이와 영서는 선악이 아닌 결핍과 보완의 관계로 설계되어 있으며, 이 구조가 드라마의 성장 서사를 단순한 성공담 이상으로 만들어줍니다.

    여자 배우들만 나오는 드라마는 투자 단계부터 난관이 많다는 이야기를 정지인 감독이 직접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가 13.4%라는 수치를 찍었다는 건, 결국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의 이야기는 성별과 장르를 초월한다는 증거입니다. 남자 배우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이만한 성과를 냈다는 사실이 여자로서 솔직히 기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이렇게 잘 만든 드라마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게 있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얼마나 경이로운가 하는 것입니다. 연기로라도 어떤 분야를 저렇게 진짜처럼 해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어디서든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제 자신을 반성하게 됩니다. '정년이'를 아직 못 보셨다면, 1화부터 끝까지 한번 쭉 보시길 권합니다. 국극이 낯설어도, 그 낯섦이 오히려 신선함이 되고 우리의 국극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eeVZzuFfQW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