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를 알면 상처가 덜할 거라고들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이유를 모른 채 끝난 관계가 있었는데, 그 답답함이 슬픔보다 훨씬 오래갔습니다. 일본 드라마 《언내추럴》을 보면서 그 감각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죽음의 진짜 원인을 끝까지 밝혀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이상하게 위안이 됐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 인간의 오래된 본능《언내추럴》은 부검의 미코토 미스미가 근무하는 민간 법의학 기관 UDI 라보를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부검의란 사망자의 사인을 의학적으로 규명하는 직업으로, 경찰 수사와는 별개로 시신 자체에서 진실을 읽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드라마는 매 화 한 건의 죽음을 다루는 1화 완결 미스터리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르물은 반전과 긴장감으..
넷플릭스 최초의 일제강점기 시대극이 2023년 추석 연휴에 공개됐습니다. 저는 역사 드라마라면 웬만해선 첫 화부터 끝까지 붙어 있는 편인데, 《도적: 칼의 소리》는 예고편을 보는 순간부터 이미 마음이 기울었습니다. 광활한 간도 벌판을 배경으로 한 액션,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온 만주 웨스턴 장르라는 조합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15년 만에 돌아온 만주 웨스턴, 그 배경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만주 웨스턴(Manchurian Western)이란 미국의 서부극 장르를 만주와 간도라는 공간에 이식한 독특한 한국식 장르를 가리킵니다. 쉽게 말해 황량한 들판, 말을 탄 사내들, 총과 칼이 뒤섞인 추격전을 20세기 초 동북아 역사 위에 올려놓은 것입니다. 2008년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이 이 장르를 세상에 알렸고, 이..
솔직히 저는 점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넷플릭스 《지옥에 떨어집니다》를 다 보고 나서, 그 말이 절반쯤은 거짓말이었다는 걸 인정하게 됐습니다. 드라마는 1980년대 일본을 뒤흔든 실존 점술가 호소키 카즈코의 일생을 그립니다. 화려한 성공 뒤에 야쿠자 유착, 황혼 혼인 스캔들, 동료 착취 의혹까지 겹겹이 쌓인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점술보다 그것을 믿었던 사람들의 심리가 더 눈에 들어옵니다.호소키 카즈코, 실제 인물과 드라마 사이일반적으로 점술가라고 하면 조용한 골방에 앉아 사주를 보는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실제 호소키 카즈코는 그 반대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1938년생인 그녀는 전후 혼란기의 가난한 집 장녀로 태어나 열 살도 채 되기 전부터 동생들을 건사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초원의 집》이라는 제목을 보기 전까지 이 드라마가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가진 작품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2026년 7월 넷플릭스에 공개된 이 드라마, 처음에는 그냥 가볍게 틀었다가 어느 순간 멍하니 앉아서 화면만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자극적인 장면 하나 없는데 왜 이렇게 계속 보게 되는 건지, 그 이유를 찾다 보니 결국 제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잔잔함이 오히려 낯선 시대, 그래서 더 불편했습니다요즘 드라마를 고를 때 저도 모르게 "1화 초반 10분 안에 뭔가 터지는 작품"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초원의 집》은 그런 방식이 아닙니다. 1화가 시작되면 19세기 캔자스 초원 위로 마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는 장면이 나오고, 이 가족이 오늘 어디에 집을 지을지 살피는 모습이 이어집니..
스릴러 드라마를 볼 때 가장 무서운 순간이 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귀신도, 잔인한 장면도 아니었습니다. 드라마 《블라인드》를 보다가 문득 "이거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인데"라고 중얼거린 그 순간이 가장 소름 돋았습니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 안에 이토록 현실적인 인간의 심리와 집단 침묵의 공포가 담겨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국민참여재판 설정이 만들어 낸 공포드라마는 한 여대생의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시작됩니다. 이른바 '조커 살인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의 피의자 정만춘이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하면서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여기서 국민참여재판이란, 법관이 아닌 일반 시민이 배심원(陪審員)으로 참여해 유죄·무죄 여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제도입니다. 쉽게 말해 전문 법조인이 아니라 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맨 끝줄 소년》은 총 6부작, 6시간짜리 시리즈입니다. 저는 공개 당일 하루 만에 다 봤는데, 그러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서 이 이야기가 맴돌았습니다. 단순히 재밌어서가 아니라, 뭔가 찜찜하게 불편한 게 남아서였습니다. 좋은 이야기란 그런 것 아닐까요.흡인력이 드라마의 핵심 장치는 '픽션 속 픽션(fiction within fiction)'입니다. 쉽게 말해,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현실을 소재로 소설을 써나가고, 그 소설을 읽는 교수가 점점 이야기에 빠져드는 구조입니다. 관객은 그 교수와 똑같은 시선으로 소설을 따라가게 됩니다. 보는 사람이 허문오 교수가 되는 셈입니다.저도 실제로 2화쯤부터 "다음에 어떻게 되는 거지?"가 아니라 "이게 진짜인 건가, 꾸민 건가?"를 계속 따져가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