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괴범과 피해 아이가 한 팀처럼 움직인다는 설정,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유괴의 날》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도 살면서 딱 한 번,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낯선 사람에게 모든 걸 맡겨버린 적이 있었거든요. 그 기억이 드라마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낯선 신뢰가 시작되는 방식위기 상황에서 신뢰가 생기는 메커니즘을 심리학에서는 상황적 귀인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상황적 귀인이란, 어떤 사람의 행동을 그 사람의 성격보다 처한 상황으로 먼저 해석하는 심리 작용을 말합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이 귀인 방식이 강하게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논리보다 빠르게 신뢰가 형성됩니다. 제가 경험한 그 순간도 딱 그랬습니다. 이유를 따질 여유가 없었고, 근거를 확인할 ..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 장면 어디서 봤더라"를 반복했습니다. 2012년 JTBC 드라마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는 네 커플의 결혼 준비기를 동시에 풀어내는 멀티 플롯 구성이지만, 보고 나서 든 첫 감상은 기대보다 피곤함이 먼저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네 커플, 그런데 왜 다 같은 길을 걷나 — 갈등구조드라마에서 여러 커플을 동시에 다루는 방식을 앙상블 드라마라고 합니다. 여기서 앙상블이란 하나의 주인공 대신 여러 인물군이 동등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조를 뜻합니다. 이 형식이 잘 작동하려면 각 커플이 서로 다른 갈등의 결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시청자가 "이 커플은 왜 싸우는 거지?"를 각각 다르게 물을 수 있거든요. 그런데 제가 보는 내내 느낀 건, 커플이 네 쌍..
로맨스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던 저도 결국 끝까지 보게 만든 드라마가 있습니다. 서양 신화 속 큐피드를 한국 정서에 녹여 낸 《내 남자는 큐피드》인데요. 500년 전 지상에 유배된 큐피드가 환생한 첫사랑과 재회하는 이야기로, 가볍게 웃으면서도 이상하게 현실적인 감정 하나가 끝까지 따라다녔습니다.판타지 로맨스, 억지 같은데 왜 빠져드는 걸까요즘 로맨스 드라마를 보다 보면 크게 두 가지 반응이 나뉘는 것 같습니다. "설정이 너무 작위적이다"라고 거리를 두는 분들이 있는 반면, "그 유치함이 오히려 매력"이라며 빠져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솔직히 처음에는 전자였습니다.《내 남자는 큐피드》의 설정은 꽤 복잡합니다. 삼신할배의 명으로 지상에 내려온 네 명의 큐피드, 그중 임무 성공률 100%를 자랑하던 엘리트..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기업 인수합병(M&A)을 소재로 한 드라마라길래 숫자 나열에 딱딱한 전문 용어만 쏟아질 줄 알았는데, 막상 보기 시작하자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JTBC 토일 드라마 《협상의 기술》 이야기입니다. 파산 직전의 대기업을 살리기 위해 협상판에 뛰어든 한 남자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제 삶 이야기처럼 읽히기 시작했습니다.M&A - 11조짜리 빚더미 위에서 시작된 이야기제가 이 드라마를 처음 틀었을 때, 솔직히 처음 5분은 좀 막막했습니다. 화면에 쏟아지는 숫자들 — 11조 원의 부채, 주가 10만 원 방어선, 계열사 매각 순서까지.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숫자들이 점점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드라마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산인 그룹이라는 대기업이 무려 11..
영혼이 바뀌면 사람도 바뀔까요? SBS 금토 드라마 《멋진 신세계》는 조선 시대 악녀의 영혼이 현대 여배우 몸에 깃든다는 설정으로 시작합니다. 초반 몰입도만큼은 역대급이라고 부를 만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끝까지 보고 나니, 그 첫인상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초반 몰입도몇 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처음 몇 달을 아무 일 없이 보낸 적이 있습니다. 출근을 안 하니 처음엔 해방감이 있었는데, 한 달쯤 지나자 오히려 "내가 누구지?"라는 감각이 흐릿해지더라고요. '회사원'이라는 역할이 저를 설명해 주고 있었는데, 그게 사라지자 남는 것이 뭔지 잘 모르겠었습니다. 《멋진 신세계》의 신설리 캐릭터를 보면서 그때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몸은 바뀌어도, 그 사람이 가진 욕망과 기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맨 끝줄 소년》은 총 6부작, 6시간짜리 시리즈입니다. 저는 공개 당일 하루 만에 다 봤는데, 그러고 나서도 한참 머릿속에서 이 이야기가 맴돌았습니다. 단순히 재밌어서가 아니라, 뭔가 찜찜하게 불편한 게 남아서였습니다. 좋은 이야기란 그런 것 아닐까요.흡인력이 드라마의 핵심 장치는 '픽션 속 픽션(fiction within fiction)'입니다. 쉽게 말해,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현실을 소재로 소설을 써나가고, 그 소설을 읽는 교수가 점점 이야기에 빠져드는 구조입니다. 관객은 그 교수와 똑같은 시선으로 소설을 따라가게 됩니다. 보는 사람이 허문오 교수가 되는 셈입니다.저도 실제로 2화쯤부터 "다음에 어떻게 되는 거지?"가 아니라 "이게 진짜인 건가, 꾸민 건가?"를 계속 따져가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