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사귄 친구가 오래 남는다는 말,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겪어보니 그게 맞았습니다. 《수하유편홍방자》는 2007년 여름, 작은 마을에서 대도시로 이사 온 16살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첫 장면을 보자마자 제 전학 시절이 떠올랐고, 그 순간부터 화면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전학생이 겪는 적응의 공식, 실제로는 다릅니다일반적으로 전학생 서사는 '처음엔 힘들지만 밝은 성격으로 금세 적응한다'는 공식을 따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이 특기 하나로 단숨에 주목받거나, 며칠 만에 학교 인싸가 되는 장면이 반복되는 식이죠. 그런데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저도 작은 동네에서 갑자기 낯선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처음 며칠은 학교에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점심을 혼자 먹으면서..
스무 살 때 끌렸던 사람 유형과 지금 끌리는 사람 유형이 완전히 달라진 경험,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저는 그 변화를 드라마 한 편을 보면서 다시 선명하게 떠올렸습니다. 2018년 JTBC에서 방영된 《제3의 매력》은 12년에 걸친 두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왜 같은 사람이 어떤 시기에는 안 보이다가 나중에야 보이는가"를 묻는 작품입니다.첫눈에 반하지 않는 연애가 더 현실적인 이유로맨스 드라마를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 '첫인상 효과'입니다. 첫인상 효과란 처음 만난 순간의 인상이 이후 관계 전반에 걸쳐 강하게 작용하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로코 드라마가 이 첫인상 효과에 기댑니다. 첫 만남에서 강렬하게 끌리고, 그 감정이 사랑으로 발전하는 구조죠.그런데 《제3의 매력》은 그 공식을..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사람을 알아갈수록 오히려 마음이 식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잘 모르는 사람 쪽으로 끌렸는데, 그 선택이 제게 꽤 비싼 수업료를 치르게 했습니다. 일본 드라마 《굽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그 이유를 처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알수록 식는 마음, 이게 문제였을까저는 이 패턴이 오래됐습니다. 처음 만날 때는 분명히 좋은데,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의 빈틈이 보이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마음이 확 돌아서 있더라고요. 이걸 심리학에서는 탈이상화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탈이상화란, 처음에 이상적으로 그렸던 상대의 이미지가 실제 모습에 의해 서서히 무너지는 과정을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는 일어나는 현상인데, 저는 유독 그 반응이 빠르고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제가..
이유를 알면 상처가 덜할 거라고들 하는데, 정말 그럴까요. 저는 오히려 반대였습니다. 이유를 모른 채 끝난 관계가 있었는데, 그 답답함이 슬픔보다 훨씬 오래갔습니다. 일본 드라마 《언내추럴》을 보면서 그 감각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죽음의 진짜 원인을 끝까지 밝혀내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는데, 이상하게 위안이 됐습니다. 이유를 알고 싶다는 것, 인간의 오래된 본능《언내추럴》은 부검의 미코토 미스미가 근무하는 민간 법의학 기관 UDI 라보를 배경으로 합니다. 여기서 부검의란 사망자의 사인을 의학적으로 규명하는 직업으로, 경찰 수사와는 별개로 시신 자체에서 진실을 읽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드라마는 매 화 한 건의 죽음을 다루는 1화 완결 미스터리 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장르물은 반전과 긴장감으..
유괴범과 피해 아이가 한 팀처럼 움직인다는 설정, 처음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런데 《유괴의 날》을 보고 나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저도 살면서 딱 한 번, 설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낯선 사람에게 모든 걸 맡겨버린 적이 있었거든요. 그 기억이 드라마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습니다. 낯선 신뢰가 시작되는 방식위기 상황에서 신뢰가 생기는 메커니즘을 심리학에서는 상황적 귀인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상황적 귀인이란, 어떤 사람의 행동을 그 사람의 성격보다 처한 상황으로 먼저 해석하는 심리 작용을 말합니다. 극한의 상황일수록 이 귀인 방식이 강하게 작동하고, 결과적으로 논리보다 빠르게 신뢰가 형성됩니다. 제가 경험한 그 순간도 딱 그랬습니다. 이유를 따질 여유가 없었고, 근거를 확인할 ..
드라마를 보다가 자꾸 제 얘기를 하게 됐습니다. 디즈니플러스 《메이드 인 코리아》 얘기입니다. 장건영이 백기태를 끝까지 쫓는 장면에서, 오래전 저도 비슷한 감각을 느꼈던 순간이 떠올랐습니다. 그 기억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포기 못 하는 사람이 왜 답답하게 느껴졌나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장건영 같은 캐릭터, 즉 원칙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이 주인공이면 응원하는 게 당연한데, 저는 중반까지도 그를 마냥 응원하지 못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원래 뭔가를 오래 붙잡는 사람이 아닙니다. 몇 번 시도하다 안 되면 놓아버리는 편인데, 딱 하나만큼은 몇 년을 붙들었습니다. 주변에서 "이제 그만해"라는 말을 몇 번 들었는데도 못 놓겠더라고요. 그 경험이 있으니까 장건영이 손해..